책 속으로
<14-15쪽 중에서>
서른한 살의 어느 날, 여름이 끝나 가고 가을이 반가웠던 9월.
병원에서 엄마의 떨리는 입술을 보았던 날. 의사 선생님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했어요. 망막색소변성증, 더 정확히는 어셔신드롬.
‘그래,
나는 결혼을 못 할 거야.’
장애가 두 가지나 있는 여자를 누가 좋아할까요? 나 같아도 엄두가 안 날 거예요. 귀가 안 들리는데 눈도 안
보이는 아내를 둔 남편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요? 출근해서 일하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일 거예요. 마음이 불편할 거예요. 치열한 회사에서 정신없이
일하고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을 텐데, 집에서도 아내를 돌봐 줘야 한다니! 정말 깊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없을 것 같아요.
그렇게
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아주 단단히 단정을 지어 버렸어요. ‘결혼’이라는 건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라고….
<18-20쪽 중에서>
‘나는 지금, 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순간이 최고로 행복해.’
오롯이 그 순간을
만끽하다가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강하게 스쳐 갔어요.
‘어라?’
지금 많은 사람이 나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 주고 있지만, 아주
만약에… 하나님의 뜻이 ‘내 눈이 안 보이게 되는 것’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지?
갑자기 당연하게 드리던 예배가 너무나
소중하게 느껴졌어요.
당연한 게 아니었어요. 아주 소중하고 귀한 거였어요.
예배가 간절해졌어요.
<44-45쪽
중에서>
무더운 여름이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칠 때쯤, 시원한 작업실에서 컴퓨터를 두들기다가 갑자기 강한 느낌이 왔어요.
‘배우자 기도!’
뭐지? 온몸에 짜릿하게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어요. 나는 하나님께 물어봤어요.
“하나님, 이제부터 배우자
기도를 제대로 해 보라는 것이죠?”
영문을 모르겠지만, 괜히 받은 느낌이 아니겠거니 생각하고 제대로 기도를 해 보자고 마음을 굳게
먹었어요.
그때가 2015년 9월이 시작되는 즈음이었어요.
<77쪽 중에서>
가을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
가고 잎사귀는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나무들이 옷을 벗기 시작했어요. 하얀 눈도 내렸어요.
어떤 사람을 알게 됐어요. 그 사람은
유머감각이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이었어요.
“하나님, 혹시 이 사람인가요?”
하지만 하나님은 안 된다고 하셨어요.
결국
즐겁게 상상했던 내 시나리오는 이루어지지 않았어요. 송구영신예배의 아름다운 고백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어요.
<128-129쪽
중에서>
방콕을 벗어나서 치앙마이로 왔어요. 방콕과 달리 치앙마이는 아주 조용했어요.
가만히 누워서 영화 한 편을 봤어요.
<앙리앙리>라는 영화였어요.
앙리는 고아원에서 자랐어요. 아이들이 하나 둘 입양되어 나가는 동안 앙리는 혼자서 어른이
되었어요. 어른이 되어 고아원을 나온 앙리는 조명가게에 취직해 사람들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일을 해요.
영화를 보고 나는 펑펑 울고
말았어요.
내 모습이 마치 사람들 속에서 외로운 앙리와 같다는 생각에 한참을 울었어요.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. 그리고 하나님께
기도했어요.
“하나님, 동물도 제 짝이 있는데 저만 혼자인 것 같아요. 속상해요. 진짜 모르겠어요. 스스로도 이렇게 답답한데,
하나님은 오죽하시겠어요?”
<154-155쪽 중에서>
상상을 해 봤어요. 하나님과 나는 같은 집에 있고, 하나님은
방 안에서 뭔가를 하고 계세요. 문득 궁금해진 나는 하나님이 계신 방으로 가요. 방해가 될까 봐 얼굴만 살짝 내밀고 수줍게 물어봐요.
빼꼼.
“하나님, 뭐 해요?”
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주 물어요.
“뭐 해?”
생각해 보니 지금껏
하나님께 ‘뭐 하세요?’라고 물어본 적이 없었어요.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 뭐 하고 계신지 궁금했던 적이 없었어요. 항상 도움이 필요하거나
속상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았어요. 아무 일도 없는데 하나님을 찾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.
문득 궁금해졌어요. 그래서 또 한번
물어봐요.
“하나님, 뭐 해요?”